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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자 KAIST STP 초빙교수님] 과학이여, 헛된'미신'을 부숴라(중앙일보, 2015.04.25)
Writer 관리자 Created 2015.07.10 Views 807

[중앙시평] 과학이여, 헛된 '미신'을 부숴라

[중앙일보] 입력 2015.04.25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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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회 ‘과학의 날’을 보내며 일제시대 ‘과학 데이’를 상기했다. 1933년 김용관(金容瓘) 선생이 다윈(C. Darwin)의 50주기 기일인 4월 19일로 정했던 과학 데이는 지배질서와 윤리는 동양의 것으로 지키되 서구 과학기술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겠다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러나 과학을 일으켜 희망을 찾자는 사회운동이 순탄할 리 없었다. 일제는 1938년 행사 뒤 김용관 선생을 투옥하는 등 탄압을 가한다. 세월이 흘러 과학 데이는 68년에 과학의 날로 재탄생하며 과학기술처 발족(67년)일인 4월 21일로 바뀐다. 이후 근대화·산업화에서 과학입국(科學立國)의 기치는 경제성장의 견인차가 된다.

 과학 데이 시절의 ‘과학의 노래’(김안서 작사, 홍난파 작곡), 그 노랫말에 담긴 우리 선조들의 얼이 심금을 울린다. 새 못 되어 저 하늘 날지 못(하)노라, 그 옛날에 우리는 탄식했으나/ 프로펠라 요란히 도는 오늘날, 우리는 맘대로 하늘을 나네/ 작은 몸에 공간은 너무도 넓고, 이 목숨에 시간은 끝없다 하나/ 동서남북 상하를 전파가 돌며, 새 기별을 낱낱이 알려 주거니/ 두드려라 부숴라 헛된 미신을, 이날 와서 그 뉘가 믿을 것이랴/ 아름다운 과학의 새론 탐구에, 볼 지어다 세계는 맑아지거니/ (후렴) 과학 과학 네 힘의 높고 큼이여, 간 데마다 진리를 캐고야 마네.

 그 시대 과학기술의 이미지를 2015년에 대입하면 어떤 스토리텔링이 될까. 프로펠러는 과학기술의 위력을 상징하고 전파는 정보통신기술(ICT)로 통합되는 세상을 예견한다. 헛된 미신 부수기는 과학의 힘이 세상을 밝힐 것이란 믿음이다. 숫자로 풀어보자. 올해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은 18조8000억원,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율로 세계 1위다. 지난 10년간 140조5000억원을 투입했다. R&D 정책은 2000년대 추격형에서 선도형으로 바뀌었다. 정부는 원천·핵심 기술 확보, 민간 부문은 응용·개발 주도로 양 날개가 구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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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결과 15년 만에 R&D 과제 수는 3.7배(2013년 5만865개)가 됐다. 그런데 논문의 피인용 수준은 R&D 투자 상위 11개국 중 꼴찌에서 셋째다(1.0%). 특허의 질적 수준도 산업통상자원부 지원 R&D 사업의 특허 출원 건수 대비 우수 특허 비율이 3.6%다(2013년). 출연연의 투자 대비 기술료 수입도 낮아(2.9%) 미국의 3분의 1 수준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국가 경쟁력은 2007년 11위에서 2014년 26위로 내리막이다.

 과학기술 투자의 회임기간이 길다는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괜찮은 성적표가 못 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의 R&D에서 시설 투자가 높고 인건비 비중이 낮으며 산업 연계성이 떨어져 생산성이 저조하다’고 지적했다. 국내외 진단에 대한 새로운 처방으로 올해에 R&D 평가체제가 대폭 바뀐다. 과학기술 논문 인용색인(SCI) 등재 논문 건수 대신 전문가 그룹의 실질적인 성과 평가가 지표가 된다. 기초연구는 과제 중심에서 연구자 중심으로, 응용개발 연구는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전환된다. 과제 기획 단계부터 상업화 모델을 제시해야 하고, 기업 수요가 반영된 자유공모형 과제를 늘리는 등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그런데 우리는 형식적인 제도 개선만으로 과학기술과 산업 현장의 애로가 해결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컨트롤타워 기능은 내내 미해결 과제였고 규제 합리화도 그렇다. 모니터링에 의해 수정 보완하는 피드백 메커니즘도 제 몫을 하지 못했다. 고질적인 덫에 빠진 R&D 성과 확산과 사업화 생산성을 끌어올리려면 소프트 파워의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 이는 사회 전반의 혁신 시스템의 취약성 극복과 과학기술계 생태계 혁신의 절실함을 의미한다. 

 최근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주최 국제 심포지엄에서 미네소타대학의 악스 자히르(Aks Zaheer) 교수는 자국의 과학기술계 내외의 신뢰가 크게 하락했음을 보여줬다. 연구비에 대한 과도한 감사로 과학자들은 시간의 42%를 규제요건 맞추기에 매달린다고 한다. 미국 쪽은 우리보다 사정이 낫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이런 상황에서 2014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 ‘미국 CTO(US Chief Technology Officer)’라는 직위를 신설하고 여성 과학자 메건 스미스(Megan Smith)를 앉혔다.

 결국 이 말을 하고 싶었구나 하는 분이 계실 텐데 과학기술 생태계 변화에서는 줄곧 10% 후반대로 과소 대표되고 있는 여성 인력을 늘려 마인드 셋을 새롭게 하는 젠더 혁신(Gendered Innovations)이 전략이 될 수 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따뜻한 과학기술’로의 가치적 전환의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달을 보내며 이것도 80년 전 우리 선조들이 말했던 미신 타파의 21세기 버전(version)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명자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초빙교수·전 환경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