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치형 교수님] "한국 테크노컬처 연대기"_ 인체공학적 사무용 가구, 노동의 무게를 덜어줬나(주간경향, 2016.04.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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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관리자 | Created 2016.04.19 | Views 17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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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테크노 컬처 연대기](15) 인체공학적 사무용 가구, 노동의 무게를 덜어줬나
팀단위로 분리, 둥글게 배치된 1993년 큐닉스컴퓨터 사무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 사무실 풍경(위쪽), 1977년 사무실 풍경 / 경향 자료사진
사무용가구 업체들이 제시하는 좋은 근무환경의 핵심은 사무실에 “오랜 시간 앉아 있어도 피로하지 않다”는 것이었는데, 이 믿기 어려운 주장을 뒷받침한 것은 인체공학 또는 인간공학이라는 학문분야였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과 유럽에서 발달한 인간공학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인간 신체의 크기와 모양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그에 꼭맞는 제품을 설계함으로써 근무자의 피로를 줄이고 작업능률을 올리는 것이 인간공학의 핵심 과제였다. 항공기 조종석, 자동차 계기반, 전화기 다이얼, 책상과 의자, 스포츠용품 등 인간과 인공물이 접촉하는 모든 인터페이스가 인간공학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공학자의 눈에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몸에 맞지 않는 제품과 환경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몸에 잘 맞지 않아 편안하지 않은 것들은 인류문명 발전의 적이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한국에서 인간공학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는 데 성공한 사람은 서울대 산업공학과의 이면우 교수였다. 이면우 교수가 1992년에 출판하여 큰 화제가 된 「W이론을 만들자-한국형 기술 한국형 산업문화 발전전략」의 첫머리에는 그가 1980년대부터 연구하고 디자인한 각종 인간공학적 제품들의 사진이 실려 있다. ‘팔목자세가 가장 편안하게 설계된 인간공학적 키보드’나 ‘인간공학적 특성을 고려하여 설계된 노인 전용 전화기’, ‘컴퓨터에 의해 최적 운전자세가 계산되고 리모컨으로 자동조정되는 인간공학적 첨단운전석’ 등이다.
학생용 인체공학 의자로 판매되었던 하이팩 의자 광고(왼쪽 사진) / <경향신문> 1985년 12월 12일 12면. 인체공학적 설계로 근무시간을 쾌적하게 만들어준다는 보루네오 사무용 의자 광고. / <매일경제> 1989년 10월 20일 13면.
‘국민표준체위’ 산업용으로 분석 활용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가 한 공장에서 노동자들을 설득하고 교육하면서 작업과정에 컴퓨터를 도입하도록 만들자, 이내 생산성이 급격히 올라가고 노동자들이 ‘신들린 작업자들’로 변모했다는 사례다. 함께 실린 새 작업대와 여성작업자의 사진에는 인간공학의 놀라운 성취를 요약하는 설명이 붙었다. “인간공학적인 작업대·부품함·조명·개인사물함을 설치하여 작업자들의 잠재욕구를 만족시킴으로써 작업 개시 2시간 만에 60%의 생산성이 향상되었다.” 편안하게 맞춰주면 신나게 일한다는 것이다. 한국형 발전전략이라는 이면우 교수의 ‘W이론’은 그가 공장에서 한국인의 몸과 습관에 꼭 맞는 작업환경을 만든 것처럼 한국 현실에 꼭 맞는 독자적인 경영철학을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인간공학은 실용적 기술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이론으로 확장될 수도 있었다.
한 사람의 몸에 잘 맞는 인간공학적 제품을 만들려면 온 나라 사람들의 신체 데이터가 필요했다. 1980년 6월 처음으로 발표된 ‘국민표준체위조사’ 연구가 이를 위한 첫 번째 시도였다. 공업진흥청이 이 사업을 주관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서는 국민의 신체를 보건의료만이 아니라 산업용 표준을 확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측정하고 분석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서울대 가정대학 연구원들이 1979년 하반기부터 전국을 돌면서 약 2만명의 몸을 사진으로 찍고 한 사람 몸에서 117개 부위의 길이를 측정했다.
국민표준체위조사에서 사용한 측정 사진 촬영법 개념도 / 이순원, ‘산업의 표준치 설정을 위한 국민표준체위 조사 연구’ / <한국의류학회지> 4 (1980), 60쪽.
이런 데이터를 활용하여 대한기계학회는 1985년 ‘사무용 가구 설계기준’ 연구보고서를 공업진흥청에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사무용 가구의 새로운 인간공학적 표준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로 직장에서 여성 비율이 올라갔다는 사실을 제시했다. 뿐만 아니라 “종일 책상에 앉아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여성이기 때문에 설계대상으로 여성의 중요성이 더욱 크다”고 지적했다. 통상적으로 남자의 몸을 기준으로 삼던 설계 관행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또 자기 몸에 비해 높은 책상을 사용하는 사무원의 경우 눈, 어깨, 허벅지 피로를 겪는 여성이 남성의 두 배나 된다는 점을 들어 “여자가 남자보다도 무리한 자세로 작업을 강행하고 있는 것”이라는 해석도 제시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책상은 과학일 뿐만 아니라 사회학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렇게 얻은 숫자와 지식이 편안한 책상과 의자의 설계와 보급으로 잘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급 사무실은 광고 속에서나마 “사무용가구의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었지만, 가장 성장이 빠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학교에서는 인간과 가구 사이의 어긋남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국민표준체위조사 결과가 발표되기 직전인 1980년 4월 <동아일보> 보도는 “수업이 일종의 고문인 셈”이 되어버린 학생들의 호소를 전했다. “의자는 높고 책상은 너무 낮아 종일 앉아 있으면 허리가 쑤시고 몸이 뒤틀린다”는 여고생도 있고, “의자는 낮고 책상은 높아 어깨와 목이 아프고 등널이 좁아 뒤로 기댈 수가 없다”는 남중생도 있었다.
인간적인 디자인, 비인간적인 생활
이런 상태는 1980년대가 끝나도록 달라지지 않았다. 1989년 2월 <경향신문> 보도는 당시 빠르게 늘고 있던 ‘틴에이저 디스크’의 원인 중 하나로 몸에 비해 작은 책·걸상을 지목하였다. 책·걸상 교체 속도가 학생들의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작은 책상 때문에 나쁜 자세로 공부하던 학생들이 요통을 얻어 병원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한 여고생은 “신장 162㎝로 학급에서 큰 편이지만 다리를 제대로 집어넣을 수 없는 작은 책상에서 자율학습을 포함, 하루 14시간 정도 구부린 채 공부해오다 지난 연말부터 심한 요통증세를 보여 왔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 학생이 겪은 고통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작은 책상이 문제인가 아니면 하루 14시간 동안 앉아서 공부를 하는 것이 문제인가. 같은 기사에서 담임교사는 그 반 학생 중 3명이 요통을 앓고 있고, 그 중 2명이 치료를 받고 있다고 증언한다. 이들은 모두 체격에 맞지 않는 작은 책·걸상을 쓰기 때문에 아팠던 것일까. 오래 앉아 있어도 피곤하지 않다는 첨단 사무용가구를 제공하면 이 학생들의 요통은 사라질 수 있었을까. 바로 이 지점에 인체공학적 디자인의 딜레마 혹은 한계가 있다. 신체의 특성을 세심하게 고려한 디자인은 제품 사용자의 몸을 당장 편안하게 해주지만 애초에 ‘그 몸이 그 자리에 왜, 어떻게 놓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학생이든 회사원이든 한 사람의 몸을 가구와 편하게 결합시키는 것은 인간공학의 과제인 동시에 사회적 의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