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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치형 교수님] "한국 테크노컬처 연대기"_ 인체공학적 사무용 가구, 노동의 무게를 덜어줬나(주간경향, 2016.04.19)
Writer 관리자 Created 2016.04.19 Views 1739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dept=116&art_id=201604111740041

 

 

[한국 테크노 컬처 연대기](15) 인체공학적 사무용 가구, 노동의 무게를 덜어줬나




신체의 특성을 세심하게 고려한 디자인은 제품 사용자의 몸을 당장 편안하게 해주지만 애초에 ‘그 몸이 그 자리에 왜, 어떻게 놓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학생이든 회사원이든 한 사람의 몸을 가구와 편하게 결합시키는 것은 인간공학의 과제인 동시에 사회적 의제다.

1987년 6월 ‘넥타이 부대’가 거리로 나와 “독재 타도, 호헌 철폐”를 외치는 모습은 민주화 운동 역사의 상징적인 순간 중 하나다. ‘넥타이 부대’는 조용하고 깨끗한 사무실을 박차고 나와 소란스러운 역사의 현장에 섰고, 그 일부가 되었다. 광장과 골목을 휘돌아 감는 변화의 물결을 고층빌딩 사무실에서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넥타이 부대’가 거리의 일을 마치고 일터로 돌아갔을 때 그들의 사무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들은 어떤 의자에 앉아 어떤 책상에서 업무를 보면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었는가? 한국 정치사가 거리에 선 ‘넥타이 부대’를 발견했다면, 테크노컬처의 역사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회사원’에 주목한다. 1980년대에는 거리뿐 아니라 사무실도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1980년대를 거치며 사무실은 하나의 시스템이 되었다. 사무실에서 일어난 큰 변화의 키워드는 사무자동화(OA· office automation)였다. 컴퓨터·팩스·복사기 등 최신 사무용 기기들이 등장했고, 이와 함께 기기들을 체계적으로 배치하고 사용해서 업무 효율을 높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사무기기와 그 사용자인 회사원들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엮어준 것은 사무용 가구였다. ‘시스템 가구’나 ‘오피스 시스템 퍼니처’라고 불리기도 했던 새로운 사무용 가구는 회사원들이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앉아서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다른 사람이 되도록 해주었다. ‘넥타이 부대’는 과학적으로 설계된 가구와 기기를 사용해서 최고의 성과를 올릴 것을 요구받게 되었다.

 
팀단위로 분리, 둥글게 배치된 1993년 큐닉스컴퓨터 사무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팀단위로 분리, 둥글게 배치된 1993년 큐닉스컴퓨터 사무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과학적 가구 설계로 업무 효율성 높여
가구회사들이 강조한 새 사무용 가구의 특징은 편리함, 편안함, 능률이었다. ‘새시대 새가구’를 모토로 삼은 동서가구는 인체공학적 설계를 적용했다는 사무용 회전의자를 광고했다. 이 의자의 “뛰어난 안락감, 편리한 기능은 앉은 자세를 바르게 하여 피로감 없이 업무능률을 향상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등판 높낮이, 좌판 높낮이, 전후 기울기 등 의자의 모든 것이 조절가능했다. 이제 과장님은 “고도의 가공기술로 제작된 우레탄 인젝션 성형으로 완성한 부드러운 촉감의 팔걸이”에 두 팔을 올린 채 몸을 좌우로 돌리거나 “이동이 부드럽고 잡음이 없는 쌍륜 캐스터”를 이용해 의자를 앞뒤로 굴리면서 회의 안건을 구상할 수 있었다.

보루네오가구는 ‘인재 제일주의! 능률제일주의!’를 내세웠다. 사무용 가구를 바꿔서 좋은 근무환경을 주는 것이 곧 “인재를 아끼는 마음”이고 이는 자연스럽게 능률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국세청, 대법원, 한국무역협회, 한국외환은행, KBS, MBC, 대우그룹, 선경그룹 등에 사무용 의자를 납품했던 보루네오가구는 “국영기업체, 관공서, 일반 사무실-8시간 근무가 쾌적하기만 합니다”라고 광고했다. 일하는 시간 내내 편안하고 쾌적할 수 있다면 그곳이 곧 유토피아가 아닌가. 동서가구는 바로 이런 생각을 담아 ‘동서 오피스 퍼니처 유토피아’(DOFIA)라는 사무용가구 토털 브랜드를 출시하기도 했다. “사무용가구의 유토피아를 추구하여 보다 쾌적한 사무환경을 제공하고 인간과 함께 미래의 꿈을 펼친다는 의지”가 들어 있었다.

1980년 사무실 풍경(위쪽), 1977년 사무실 풍경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 사무실 풍경(위쪽), 1977년 사무실 풍경 / 경향 자료사진

 

 

 

사무용가구 업체들이 제시하는 좋은 근무환경의 핵심은 사무실에 “오랜 시간 앉아 있어도 피로하지 않다”는 것이었는데, 이 믿기 어려운 주장을 뒷받침한 것은 인체공학 또는 인간공학이라는 학문분야였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과 유럽에서 발달한 인간공학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인간 신체의 크기와 모양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그에 꼭맞는 제품을 설계함으로써 근무자의 피로를 줄이고 작업능률을 올리는 것이 인간공학의 핵심 과제였다. 항공기 조종석, 자동차 계기반, 전화기 다이얼, 책상과 의자, 스포츠용품 등 인간과 인공물이 접촉하는 모든 인터페이스가 인간공학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공학자의 눈에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몸에 맞지 않는 제품과 환경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몸에 잘 맞지 않아 편안하지 않은 것들은 인류문명 발전의 적이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한국에서 인간공학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는 데 성공한 사람은 서울대 산업공학과의 이면우 교수였다. 이면우 교수가 1992년에 출판하여 큰 화제가 된 「W이론을 만들자-한국형 기술 한국형 산업문화 발전전략」의 첫머리에는 그가 1980년대부터 연구하고 디자인한 각종 인간공학적 제품들의 사진이 실려 있다. ‘팔목자세가 가장 편안하게 설계된 인간공학적 키보드’나 ‘인간공학적 특성을 고려하여 설계된 노인 전용 전화기’, ‘컴퓨터에 의해 최적 운전자세가 계산되고 리모컨으로 자동조정되는 인간공학적 첨단운전석’ 등이다.

학생용 인체공학 의자로 판매되었던 하이팩 의자 광고(왼쪽 사진) / <경향신문> 1985년 12월 12일 12면. 인체공학적 설계로 근무시간을 쾌적하게 만들어준다는 보루네오 사무용 의자 광고. / <매일경제> 1989년 10월 20일 13면.

학생용 인체공학 의자로 판매되었던 하이팩 의자 광고(왼쪽 사진) / <경향신문> 1985년 12월 12일 12면. 인체공학적 설계로 근무시간을 쾌적하게 만들어준다는 보루네오 사무용 의자 광고. / <매일경제> 1989년 10월 20일 13면.

 


‘국민표준체위’ 산업용으로 분석 활용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가 한 공장에서 노동자들을 설득하고 교육하면서 작업과정에 컴퓨터를 도입하도록 만들자, 이내 생산성이 급격히 올라가고 노동자들이 ‘신들린 작업자들’로 변모했다는 사례다. 함께 실린 새 작업대와 여성작업자의 사진에는 인간공학의 놀라운 성취를 요약하는 설명이 붙었다. “인간공학적인 작업대·부품함·조명·개인사물함을 설치하여 작업자들의 잠재욕구를 만족시킴으로써 작업 개시 2시간 만에 60%의 생산성이 향상되었다.” 편안하게 맞춰주면 신나게 일한다는 것이다. 한국형 발전전략이라는 이면우 교수의 ‘W이론’은 그가 공장에서 한국인의 몸과 습관에 꼭 맞는 작업환경을 만든 것처럼 한국 현실에 꼭 맞는 독자적인 경영철학을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인간공학은 실용적 기술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이론으로 확장될 수도 있었다.

한 사람의 몸에 잘 맞는 인간공학적 제품을 만들려면 온 나라 사람들의 신체 데이터가 필요했다. 1980년 6월 처음으로 발표된 ‘국민표준체위조사’ 연구가 이를 위한 첫 번째 시도였다. 공업진흥청이 이 사업을 주관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서는 국민의 신체를 보건의료만이 아니라 산업용 표준을 확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측정하고 분석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서울대 가정대학 연구원들이 1979년 하반기부터 전국을 돌면서 약 2만명의 몸을 사진으로 찍고 한 사람 몸에서 117개 부위의 길이를 측정했다.

국민표준체위조사에서 사용한 측정 사진 촬영법 개념도 / 이순원, ‘산업의 표준치 설정을 위한 국민표준체위 조사 연구’ / <한국의류학회지> 4 (1980), 60쪽.

 

 

국민표준체위조사에서 사용한 측정 사진 촬영법 개념도 / 이순원, ‘산업의 표준치 설정을 위한 국민표준체위 조사 연구’ / <한국의류학회지> 4 (1980), 60쪽.

 

 

 

이런 데이터를 활용하여 대한기계학회는 1985년 ‘사무용 가구 설계기준’ 연구보고서를 공업진흥청에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사무용 가구의 새로운 인간공학적 표준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로 직장에서 여성 비율이 올라갔다는 사실을 제시했다. 뿐만 아니라 “종일 책상에 앉아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여성이기 때문에 설계대상으로 여성의 중요성이 더욱 크다”고 지적했다. 통상적으로 남자의 몸을 기준으로 삼던 설계 관행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또 자기 몸에 비해 높은 책상을 사용하는 사무원의 경우 눈, 어깨, 허벅지 피로를 겪는 여성이 남성의 두 배나 된다는 점을 들어 “여자가 남자보다도 무리한 자세로 작업을 강행하고 있는 것”이라는 해석도 제시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책상은 과학일 뿐만 아니라 사회학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렇게 얻은 숫자와 지식이 편안한 책상과 의자의 설계와 보급으로 잘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급 사무실은 광고 속에서나마 “사무용가구의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었지만, 가장 성장이 빠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학교에서는 인간과 가구 사이의 어긋남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국민표준체위조사 결과가 발표되기 직전인 1980년 4월 <동아일보> 보도는 “수업이 일종의 고문인 셈”이 되어버린 학생들의 호소를 전했다. “의자는 높고 책상은 너무 낮아 종일 앉아 있으면 허리가 쑤시고 몸이 뒤틀린다”는 여고생도 있고, “의자는 낮고 책상은 높아 어깨와 목이 아프고 등널이 좁아 뒤로 기댈 수가 없다”는 남중생도 있었다.

인간적인 디자인, 비인간적인 생활
이런 상태는 1980년대가 끝나도록 달라지지 않았다. 1989년 2월 <경향신문> 보도는 당시 빠르게 늘고 있던 ‘틴에이저 디스크’의 원인 중 하나로 몸에 비해 작은 책·걸상을 지목하였다. 책·걸상 교체 속도가 학생들의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작은 책상 때문에 나쁜 자세로 공부하던 학생들이 요통을 얻어 병원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한 여고생은 “신장 162㎝로 학급에서 큰 편이지만 다리를 제대로 집어넣을 수 없는 작은 책상에서 자율학습을 포함, 하루 14시간 정도 구부린 채 공부해오다 지난 연말부터 심한 요통증세를 보여 왔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 학생이 겪은 고통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작은 책상이 문제인가 아니면 하루 14시간 동안 앉아서 공부를 하는 것이 문제인가. 같은 기사에서 담임교사는 그 반 학생 중 3명이 요통을 앓고 있고, 그 중 2명이 치료를 받고 있다고 증언한다. 이들은 모두 체격에 맞지 않는 작은 책·걸상을 쓰기 때문에 아팠던 것일까. 오래 앉아 있어도 피곤하지 않다는 첨단 사무용가구를 제공하면 이 학생들의 요통은 사라질 수 있었을까. 바로 이 지점에 인체공학적 디자인의 딜레마 혹은 한계가 있다. 신체의 특성을 세심하게 고려한 디자인은 제품 사용자의 몸을 당장 편안하게 해주지만 애초에 ‘그 몸이 그 자리에 왜, 어떻게 놓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학생이든 회사원이든 한 사람의 몸을 가구와 편하게 결합시키는 것은 인간공학의 과제인 동시에 사회적 의제다.

 
요즘 몸을 편하게 하는 사무용가구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는 곳은 정보기술(IT) 업계이다. 2011년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네이버, 엔씨소프트, 안철수연구소 같은 주요 기업들이 고가의 사무용 의자를 일괄 구입해서 직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일하는 시간 대부분을 의자에 앉아서 보내는 IT 개발자들에게 편한 의자는 ‘사원복지의 제1척도’라는 것이다. 튼튼하고 매끄러운 사무실 의자는 개발자들이 일하고 싶게 만들고 회사를 자랑스러워 하게 만들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IT업계는 노동시간이 긴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2013년 조사에 따르면 IT산업 노동자는 일주일에 평균 57.3시간 일하고, 그 중 19.4%는 70시간 넘게 일을 한다. “개발자는 24시간 코딩기계가 돼야 한다”는 말도 듣는다(<경향신문> 2013년 6월 7일). 편안한 인체공학 의자가 불안한 노동의 무게를 다 견디지 못할 때 사람이 쓰러진다. 그래도 이들은 불편한 책상에서 하루 14시간 공부하던 1989년의 여고생보다는 나은 처지인 것일까. 갑갑하게 넥타이를 맨 채 뛰어야 했던 1987년의 선배들보다 과연 더 자유로운 것일까.

<전치형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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