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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치형][미래 오디세이]‘로봇시민권자’와 한국 사회의 민낯(경향신문, 2018.1.31)
Writer 관리자 Created 2018.01.31 Views 674

 

[미래 오디세이]‘로봇시민권자’와 한국 사회의 민낯

 

 

 

전치형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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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30일 열린 ‘AI 로봇 소피아 초청 콘퍼런스: 4차 산업혁명, 로봇 소피아에게 묻다’라는 행사는 2018년의 대한민국 서울에 서둘러 도착한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홍콩에 있는 핸슨로보틱스에서 2016년에 개발한 로봇 소피아는 사람 여성처럼 생겼다. 자신이 미국에서 ‘착상’되어 홍콩에서 ‘태어났다’라고 소개하는(연합뉴스TV) 소피아는 2017년 10월에는 로봇 최초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민권을 받았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 홍콩 태생의 사우디아라비아 ‘로봇시민권자’가 한국을 방문한 것은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의 초청 덕분이었다. 

 

박 의원과 소피아는 로봇이 대체할 인간의 직업에 대해, 인간과 로봇이 사랑에 빠질 가능성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과 촛불혁명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소피아에게 던진 여러 질문 중 ‘권리’와 ‘안전’에 대한 것이 특히 눈에 띄었다. 굳이 로봇에게 물을 필요는 없었던 이 질문들은 오히려 2018년 한국 사회의 모습을 잘 드러내 주었다. 

 

박 의원은 로봇에게 ‘전자인간’이라는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소피아는 자신을 포함하는 ‘로봇의 권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사우디아라비아의 ‘로봇시민권자’ 소피아는 미리 준비한 듯 무난한 대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소피아의 대답 자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로봇에게 시민적 권리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태도다. 박 의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서울을 ‘4차 산업혁명’의 전진기지로 자리매김하는 상징적인 조치로 소피아에게 ‘명예시민권’을 주는 ‘진취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미 사우디아라비아 시민권을 얻은 두 살짜리 로봇 소피아에게 굳이 색동저고리와 분홍치마를 입히고, 대한민국 서울의 명예시민권까지 주려는 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일본의 로봇 문화를 연구하는 인류학자 제니퍼 로버트슨은 자이니치 등 비일본인 거주자, 난민, 이주노동자 등 일본 사회에서 일하고 살면서도 동등한 권리 없이 차별을 받는 사람들에 비해, 각종 로봇과 애니메이션 캐릭터에게는 더 쉽게 호적이나 명예주민표가 발급되는 상황의 모순을 지적한 바 있다. 인간의 권리는 거부되기 일쑤지만 로봇의 권리는 기꺼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소피아가 사우디아라비아 시민권을 받았을 때도 로봇이 사우디의 보통 여성보다 복장, 여행 등에서 더 많은 자유와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는 냉소적인 논평이 있었다. 

 

난민, 이주노동자, 장애인, 성소수자 등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 쳐야만 하는 한국에서도 ‘로봇시민권자’의 방문은 사람의 권리, 즉 인권의 현실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유난히 까다롭다는 한국의 난민 인정 절차를 기다리며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사람들과 국회의원의 초청으로 박수를 받으며 한국에 들어온 소피아의 차이, 휠체어를 타고서는 고속버스도 제대로 이용할 수 없는 장애인과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어디든 모시고 다니는 소피아의 차이는 무엇인가. 낯설다는 이유로 각종 혐오의 언어와 물리적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은 여기에서, 우리는 로봇과 공존하고 사랑에 빠지는 미래를 기대해도 괜찮을까. 로봇에게 명예시민권을 주자는 제안을 미래지향적이라며 쉽게 반길 일은 아니다. 로봇의 권리에 대한 상상을 인간의 권리에 대한 성찰과 연결하는 것이 더 미래지향적이다. 

 

대화 후반에 이르러 박 의원은 소피아에게 일종의 윤리적 딜레마를 제시했다. 큰 화재 현장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아이 한 명과 노인 한 명을 발견했는데 그중 한 명만 구할 수 있다면 누구를 구하겠느냐고 물은 것이다. 자율주행차 알고리즘이 사고를 피할 수 없는 긴급 상황에서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치어야 하는지를 묻는 ‘트롤리 문제’의 소방구조 버전인 셈이다. 묻는 사람은 많고 답하려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이상한 문제다. 소피아는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출구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구하겠다는 대답을 하고 넘어갔다. 

 

이것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꼭 물어야 하는 유의미한 질문인 것처럼 포장될 수 있다는 사실이 2018년 한국 사회의 맥락을 보여준다. 소피아를 보러 온 사람들 중에 전·현직 소방관이 한 명이라도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피아가 받은 질문 자체의 잔인함은 소방관이 아니라도 느낄 수 있다. 제천에서, 밀양에서, 그 전의 숱한 현장에서 불길을 뚫고 다행히 노인과 아이를 구해서 나왔거나, 어떻게든 구해보려다 다치거나 사망한 소방관과 의료진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들은 그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까. 

 

규정을 지키지 않고, 허술한 법규를 내버려 두고, 용도를 변경하고, 점검을 소홀히 하고, 소방 인력과 장비를 늘리지 않은 채로 있다가 노인과 아이를 모두 잃는 참사를 겪으면서도, 우리는 똑똑하다는 인공지능 로봇이 노인과 아이 중 누구를 구할 것인지 궁금해한다. 로봇에게 누구를 구하겠느냐고 물어서 우리는 어떤 대단한 구조 원칙과 기준을 세우고 싶어 하는 것일까? 인공지능 로봇의 윤리성을 떠보는 사고실험은 두뇌에는 자극이 될지 몰라도 소방 안전과 인명 구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4차 산업혁명, 로봇 소피아에게 묻다’라고 했지만, 로봇은 미래에서 온 예언자가 아니다. 로봇은 ‘권리’에도 ‘안전’에도 별 관심이 없다. 우리의 무관심을 로봇이 덮어줄 수도 없다. 대신 로봇은 우리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 정도는 될 수 있다. 우리는 소피아를 통해 자신을 직시하고 점검할 수 있다. 로봇과 대화하고 사랑에 빠질 수 있는지만 묻지 말고, 로봇의 권리를 고민할 정도의 사회에서 인간의 권리는 어떤 처지에 있는지 따져보자. 또 딜레마 아닌 딜레마에 빠져 갈팡질팡하지 말고, 노인이든 아이든 사람을 더 구하기 위해 어떤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지를 점검해보자. 이것도 로봇의 중요한 쓸모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1312121005&code=990100#csidxaffd25a870351a088202ad4f52c08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