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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치형, 과학의 언저리] 조국을 떠미는 ‘억센 날개’(한겨례,2018.9.6)
Writer 관리자 Created 2018.09.20 Views 1138

[한겨레] 기하, 벡터, 역사, 사회에서 우리는 세계를 다른 시선에서 보는 법을 익힌다. 또 누구라도 논리를 익히고 근거를 쌓는다면 논리 없는 허위와 근거 없는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것이 “4차 산업혁명의 바탕”이 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중등 교육의 쓸모고 임무다.

 

전치형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선희 동무, 조국의 진보에 충실한 과학의 날개를 달아주지 못하는 연구는 개인적인 명예의 추구로 떨어지고 만다는 걸 명심해두시오.” 이는 북한의 과학환상소설(SF) 작품 <억센 날개>에 등장하는 과학자 지선희가 동료 과학자 강철혁에게 듣는 충고다. 2005년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조선문학>에 실렸던 작품을 과학잡지 <에피>가 최신호에서 소개했다.

지선희가 설계한 ‘에네르기 발전소’에 값비싼 금속이 많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강철혁은 이렇게 말한다. “이 땅 우에 부강 조국을 일떠세우는 길에 앞장선 우리 과학자들이 자기의 창조물 하나하나에 조국의 재부를 아끼고 사랑하며 그를 위해 자신의 있는 지혜와 힘을 깡그리 바친 피 타는 노력이 엿보이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지선희의 발표를 높이 평가했던 연구소장도 이 지적을 듣고는 맞장구를 친다. “조국의 진보에 억센 날개를 달아주는 것, 달아주되 짐이 되지 않고 조국을 힘차게 떠미는 충실한 날개를 달아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과학자들이 아니겠습니까.”

처음 읽는 북한 과학환상소설에 나오는 과학자들의 말투는 낯설다. 그렇지만 개인의 성장이 아니라 오직 조국의 진보를 위해 과학자들이 헌신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다지 낯설지 않다. 과학이 왜 필요한지, 과학자의 존재 의의는 무엇인지에 대한 남과 북의 인식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가령 7월 말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를 비롯한 13개 과학기술계 단체가 공동으로 낸 성명서와 의견서는 “수학·과학이 4차 산업혁명의 바탕”이며 “국가 과학기술 발전은 이공계 인재 양성에서부터 시작”되므로 “미래 과학기술 경쟁력”을 위해 수학과 과학을 더 많이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공계 중등 교육정책에 대한 기본 철학”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이 ‘4차 산업혁명’, ‘미래 과학기술 경쟁력’, ‘국가 과학기술 발전’ 말고는 없었다. 남이든 북이든 과학기술을 국가와 혁명을 위한 도구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계가 이런 입장을 낸 것은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기하와 벡터 과목을 제외하려는 교육부 계획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과학기술계도 ‘문·이과 융합 인재 양성’이라는 대의에 찬성하지만, 막상 무엇을 얼마나 가르칠지 정할 때가 되면 과학기술이 국가와 혁명을 위해 더 긴요한 도구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한마디로 문학이나 사회 과목보다 수학과 과학이 훨씬 더 ‘억센 날개’라는 것이다. 과학기술계 의견서는 “사회탐구 과목은 ‘살다가 혼자서라도 문득문득 들어서서 깊이를 모르고 파고들 수 있는’ 학문으로, 수학·과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작하기가 쉽고,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자료도 많다”고 주장했다.

과학자야말로 조국의 진보와 번영을 위한 ‘억센 날개’라는 호소를 통해 고등학교에서 기하와 벡터를 왜 가르쳐야 하는지 납득하기는 어렵다. 기하와 벡터를 배움으로써 한 사람이 어떻게 더 넓어지고 깊어지고 성장할 수 있는지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학과 과학의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기하와 벡터는 눈에 보이는 모양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내 앞에 보이는 세계의 형상 뒤에 어떤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첫눈에는 다른 것 같아도 보는 각도를 바꾸면 닮아 보이는 것들, 거의 똑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크게 다른 것들이 있다는 통찰도 기하와 벡터에서 얻을 수 있다.

사실 이는 기하와 벡터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역사나 사회 과목에서도 배우는 것들이다. 이과 과목에서 우리는 세계의 물질적, 기하학적 구조를 배우고, 문과 과목에서 우리는 심리와 감정의 구조, 계급과 젠더의 구조를 배운다. 이렇게 연결된 세계의 구조가 안팎의 힘을 통해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도 배운다. 즉 기하, 벡터, 역사, 사회에서 우리는 세계를 다른 시선에서 보는 법을 익힌다. 또 누구라도 논리를 익히고 근거를 쌓는다면 논리 없는 허위와 근거 없는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것이 “4차 산업혁명의 바탕”이 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중등 교육의 쓸모고 임무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세계를 어디까지 볼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얼마나 다르게, 얼마나 다양하게 볼 수 있도록 도울 것인가. 수학과 과학을 조국을 위한 ‘억센 날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한 밝은 눈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