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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치형, 과학의 언저리] 엠아이티와 노예(한겨레, 2018.2.22)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2.22 20:02
    조회수
    73

 

[전치형, 과학의 언저리] 엠아이티와 노예

 

 

1850년 로저스의 집에는 노예가 여섯 명 있었다. 버지니아주 인구조사 문서를 검토해서 이 사실을 찾아낸 것은 엠아이티 기록보관소의 아키비스트인 노라 머피다. 엠아이티 설립자가 노예 소유주였다는 사실을 엠아이티 기록관리자가 세상에 알린 것이다.

 

 

전치형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우리 설립자는 노예 소유주였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역사학 교수 크레이그 와일더가 엠아이티를 설립하고 초대 총장을 지낸 윌리엄 바턴 로저스를 가리키며 한 말이다(그렇다, 엠아이티에도 역사학 교수가 많이 있다). 엠아이티보다 오래된 미국 대학들의 초기 역사가 노예제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비교적 일찍 노예제가 종식된 미국 북동부의 매사추세츠주에서 1861년 설립되었고,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에야 교육을 시작한 엠아이티도 그 역사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사실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지질학자이자 물리학자였던 로저스는 1853년에 매사추세츠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남부의 버지니아 대학에서 자연철학 교수로 일했다. 당시 버지니아주에서는 노예 소유가 합법이었다. 최근 발굴된 기록에 따르면 1850년 로저스의 집에는 노예가 여섯 명 있었다. 버지니아주 인구조사 문서를 검토해서 이 사실을 찾아낸 것은 엠아이티 기록보관소의 아키비스트인 노라 머피다. 엠아이티 설립자가 노예 소유주였다는 사실을 엠아이티 기록관리자가 세상에 알린 것이다.

 

머피의 자료조사는 2017년 가을학기에 열린 ‘엠아이티와 노예제’라는 수업의 일부였다. 머피와 와일더가 함께 이끈 이 수업은 엠아이티 총장과 인문사회대학 학장의 적극적인 승인과 지지를 받아 개설되었다. 수강생들은 학교 기록보관소의 자료를 직접 뒤져서 엠아이티와 노예제 또는 인종주의의 연관을 조사했다. 수업 참가자들은 학교 설립자가 노예를 소유했다는 사실과 그 밖에 새로 밝혀낸 엠아이티의 역사를 총장에게 설명했다. 엠아이티 졸업생들이 남북전쟁 이후 남부 지역 재건에 이바지했다는 사실도 있었고, 19세기 말 엠아이티 학생 신문에 흑인에 대한 모욕적인 묘사가 실렸다는 사실도 있었다.

 

라파엘 라이프 엠아이티 총장은 일을 더 키웠다. 2월12일 학교 구성원 전체에게 보낸 편지에서 라이프 총장은 “과거로부터 밝혀낸 새로운 사실”을 함께 직면하자고 촉구했다. 학교는 수업을 소개하는 동영상을 제작해 유튜브에 올렸다. 2월16일에는 공개토론회를 열어 노예제 수업 참가자들의 발표를 듣고 토론했다. ‘엠아이티와 노예제의 유산’이라는 제목의 토론회는 엠아이티 안팎의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혁신의 상징인 미디어랩 건물에서 열렸다.

 

빛나는 미래를 지향하는 미디어랩과 어두운 과거가 숨어 있는 기록보관소를 오가면서 학생들은 무엇을 배웠을까. 엠아이티에 입학하자마자 이 수업을 들은 신입생 켈빈 그린은 <보스턴 글로브>와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역사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예제 수업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학교 도서관 웹사이트도 비슷한 메시지를 강조한다. “엠아이티라는 아이디어는 노예 경제 속에서 태어났다고 단언할 수 있다.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이것이 우리의 역사다.” 옛날 자료를 뒤지면서 학생들은 엠아이티의 역사성과 과학기술의 사회성을 배운 것이다.

 

엠아이티 학생들이 노예제의 역사를 직시하자는 총장의 편지를 받은 2월12일, 울산과학기술원(UNIST) 졸업생들은 과학기술을 공동체와 삶의 문제로 바라보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을 들었다. 의례적으로 던지는 노벨상과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당부 때문에 다소 효과가 떨어지긴 했지만, ‘과학과 삶’이라는 이례적인 제목의 축사에서 대통령은 “사람을 생각하는 과학의 길”을 강조했다. 특히 “여러분의 과학이 공동체의 삶 속에서 빛나기 바랍니다”라는 문장은 대통령이 젊은 과학자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축복이자 묵직한 조언이었다. 역사적 진공 상태나 미래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공동체 안에서 과학과 삶을 이어달라는 부탁이었다.

 

노예제와 산업혁명은 모두 과학기술 역사의 일부이고 공동체의 삶의 문제이다. 엠아이티의 현재는 노예제의 역사뿐만 아니라 전쟁의 역사, 여성의 역사, 민주주의의 역사, 자본주의의 역사와 촘촘히 얽혀 있다. 한국의 모든 과학기술 연구와 교육기관도 나름의 방식으로 한국 사회의 역사와 얽혀 있다. 예외적인 경우에만 과학기술이 잠시 사회와 얽히는 것이 아니라,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과학기술은 마치 사회와 분리된 것처럼 보인다. 과학기술과 삶과 사회의 예외적인 분리를 강조하는 대신 그 일상적인 얽힘을 고민하자는 것이 라이프 총장과 문재인 대통령의 메시지에 담긴 과학관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3260.html#csidxa6e603a6c687448a6c0eed219706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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